표준 발음

받침의 발음

최혜원(崔惠媛) / 국립국어연구원

(1) “빗/빚/빛도[빋또] 없이 산다.”

앞뒤 문맥 없이 이 세 문장 중 어느 하나를 귀로만 듣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발음되는 ‘[빋또]’의 원형을 이끌어 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빗이 없어 엉클어진 머리 채 그대로 다니는 것인지, 어려운 형편이지만 빚을 지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하며 사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빗, 빚, 빛’이 자음으로 시작하는 말과 결합할 때에는 받침 ‘ㅅ, ㅈ, ㅊ’ 중 어느 것 하나 글자 그대로 발음되지 않고 대표음인 ‘ㄷ’으로 소리나기 때문이다. ‘ㄷ’이라는 대표음으로 가려진 이들 받침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다음 음절의 첫소리로 살아난다.

(2) 빗이[비시] 빚이[비지] 빛이[비치] / 빗을[비슬] 빚을[비즐] 빛을[비츨]

자음 앞이나 어말 위치에서 ‘[ㄷ]’ 발음으로 실현되는 것은 이 외에도 ‘ㅌ(밭도[받또])’, ‘ㅆ(있다[읻따])’이 있다. 그 밖에도 ‘ㄲ(밖, 닦다)’, ‘ㅋ(부엌, 남녘)’은 ‘[ㄱ]’으로, ‘ㅍ(앞, 무릎)’은 ‘[ㅂ]’으로 대표되어 발음된다. 우리말에서는 음절말 위치에서 자음이 ‘ㄱ, ㄴ, ㄷ, ㄹ, ㅁ, ㅂ, ㅇ’의 일곱 가지 소리로만 실현되기 때문에 이 외의 자음은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일곱 자음 중 어느 하나로 소리나게 되는 것이다.

받침 ‘ㅅ, ㅆ, ㅈ, ㅊ, ㅌ’은 [ㄷ], ‘ㄱ, ㄲ’은 [ㄱ], ‘ㅍ’은 [ㅂ]으로 소리나

이것은 겹받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현대의 우리말에서는 자음 셋을 이어서 발음할 수가 없고 두 개까지만 발음할 수 있는 구조상의 제약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우리말과 달리 영어에서는 ‘spring’, ‘stripe’와 같이 모음의 개입 없이 세 자음을 연속적으로 발음한다. 물론 일부 방언에서도 ‘흙’이나 ‘읊다’와 같이 ‘ㄹ’이 앞에 오는 몇몇 겹받침이, 단독형으로 실현되거나 자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어미와 결합할 때 받침으로 ‘ㄺ’, ‘ㄿ’ 소리가 모두 나는 경우가 있으나 표준 발음으로는 인정하기 어렵다.

겹받침은 어말 또는 자음 앞에서 두 개의 자음 중 하나를 탈락시켜 발음한다. 그래서 겹받침은 앞 자음이 발음되는 것과 뒤 자음이 발음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ㄳ’, ‘ㄵ’, ‘ㄼ, ㄽ, ㄾ’, ‘ㅄ’의 경우 둘째 자음이 탈락하고 각각 앞 자음 [ㄱ, ㄴ, ㄹ, ㅂ]으로 발음한다.

(3) 넋[넉] / 앉다[안따] / 여덟[여덜] 곬[골] 핥다[할따] / 값[갑]

또한 겹받침 ‘ㄺ, ㄻ, ㄿ’은 첫째 자음을 탈락시키고 [ㄱ, ㅁ, ㅂ]으로 발음한다.(닭[닥], 삶[삼:], 읊다[읍따]) 다만 ‘맑게[말께], 묽고[물꼬], 얽거나[얼꺼나]’의 예에서 보듯이 용언의 어간 말음 ‘ㄺ’은 ‘ㄱ’ 앞에서 [ㄹ]로 발음한다.

‘밟다’는 ‘[밥:따]’로 ‘넓죽하다’는 ‘[넙쭉하다]’로

그런데 둘째 자음이 탈락하는 겹받침 중 ‘ㄼ’ 받침은 발음의 실현이 다소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ㄼ’은 ‘여덟’, ‘넓다’에서와 같이 ‘[ㄹ]’로 발음된다. 그러나 ‘밟다’만은 예외여서 ‘ㄹ’이 탈락하고 ‘[ㅂ]’ 소리만 남는다.(밟다[밥:따], 밟지[밥:찌], 밟게[밥:께], 밟는[밥:는])‘넓다’도 ‘넓다[널따]’, ‘넓고[널꼬]’ 등에서는 [ㄹ]이 발음되나 일부 파생어나 합성어에서는 [ㅂ]이 발음된다.(넓죽하다[넙쭉하다], 넓둥글하다[넙뚱글하다], 넓데데하다[넙떼데하다]) ‘넓-’과 결합한 파생어 중에는 [널]로 소리나는 것이 있는데, 이 경우 “겹받침의 끝소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소리대로 적는다”는 「한글 맞춤법」 제21항에 따라 어간의 형태를 밝히지 않고 ‘널찍하다’, ‘널따랗다’와 같이 소리대로 적게 되어 있어 발음하기가 좀더 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