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컴퓨터와 한글

이승재(李承宰) / 국립국어연구원

올해도 어김없이 한글날이 찾아왔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을 위한 찬양 대회라도 열 듯 많은 행사들이 떠들썩하게 펼쳐진다. 한글의 창제 원리, 한글의 역사, 한글의 발전상 등 일반인들이 평소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던 여러 가지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그러한 행사장 밖으로만 나오면 우리는 곧바로 온갖 영어, 프랑스어 등의 외래어가 난무하고 있는 간판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한글을 위한 행사장 밖은 국적을 알 수 없는 나라의 거리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 역시 국적을 알 수 없는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일상 생활에서 우리말은 서서히 그 입지를 좁혀 가고 있고 그에 따라 한글의 사용 범위도 점차 좁아지고 있다.


21세기 정보화 사회에는 컴퓨터에서 한글 처리가 매끄럽게 되어야

21세기 정보화 사회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서비스가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컴퓨터를 배우기에 앞서 외국어부터 배워야 하는 2등 국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컴퓨터에서는 우리말과 한글이 어떠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한마디로 우리의 언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듯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한글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 왔다. 타자기 시대에는 모아쓰기의 문제로 그러했고 컴퓨터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컴퓨터에서 한글을 표현하는 방식과 글자 수의 문제로 그러하여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가끔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서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컴퓨터를 보게 된다. 사람의 말은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컴퓨터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것이라면 컴퓨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자 처리는 사람이 문자를 처리하는 방식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현재 컴퓨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문자 체계를 사용하고 있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글자 수도 다른 코드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학’이라는 글자를 ‘ㅎ + ㅏ + ㄱ’의 결합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KS 완성형 한글 코드나 유니코드에서는 완성된 ‘학’ 자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종성 ‘ㄱ’이 쓰인 글자만을 찾고자 할 경우 ‘학’이라는 글자에 ‘학 = ㅎ + ㅏ + ㄱ’이라는 부가적인 정보를 주어야 컴퓨터에서 종성 ‘ㄱ’이 쓰인 글자로 ‘학’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게 ‘ㅎ, ㅏ, ㄱ’을 각각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게 하고 이들을 결합하여 ‘학’과 같은 문자를 만들게 하면 이러한 번거로움은 없어지게 되고 이러한 처리는 사람이 글자를 만드는 방식과 같아지게 된다.
   실제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형태소 분석이나 문장 분석을 할 때 내부적으로는 후자와 같은 방식의 조합형 코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글 워드프로세서의 경우에도 내부적인 조합형 코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표준 코드와 내부적인 코드를 따로 만들어 써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컴퓨터에서의 올바른 한글 처리는 국가 경쟁력의 밑거름

컴퓨터에서 쓰이는 문자 코드의 문제는 일부에서 말하듯 단순히 컴퓨터에서 입력할 수 있는 글자 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글의 운용 원리에 맞게 컴퓨터를 움직이는 일은 미래의 지식 산업을 이끌어 나갈 말하고 생각하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기초 공사이며 기초 설계도인 것이다. 그 방향이 잘못되면 한글을 사용한 우리말 지식 산업의 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컴퓨터에서 써야 하는 한글 글꼴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영어의 경우 많은 글꼴이 오랜 기간을 거쳐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는 반면 우리 한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한글은 영어보다 획수가 많은 글자여서 글꼴을 아름답게 다듬기가 더욱 힘들다. 한글은 ‘승, 숭’이나 ‘흥, 홍’과 같이 자칫하면 구별하기가 어려운 글자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글꼴 다듬기에 정성을 쏟아야만 아름답고 정확한 글꼴을 만들 수 있다.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아름답고 정확한 글꼴은 정보의 정확성과 전달 속도를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글 글꼴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
   한글을 사용하여 우리말에 관련된 검색이나 정보 처리 작업을 하려고 할 때 현재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작업을 진행하기가 힘들다. 컴퓨터가 한글의 운용 원리와 다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어 자소 단위의 사고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글과 우리말을 컴퓨터에서 운용하기 위한 기초 공사와 기초 설계도가 아직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21세기에는 한글 처리로 인한 이러한 답답함들이 말끔히 없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