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어

‘테크노’, ‘컴닥터’


박용찬(朴龍燦) / 국립국어연구원

해방 이후 서구와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상당히 많은 외국어·외래어가 우리말에 들어와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러한 외국어·외래어를 제1차 자료로 하여 신어를 만들어 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외국어 본래의 기능이나 용법과 다르게 사용되는 말들이 적지 않다.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외국어를 제1차 자료로 하여 만들어진 신어 가운데 특이한 유형 몇 가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외국어(특히, 영어)에서 온 말로 우리말에서 오래 전부터 신어를 만드는 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로 ‘노(no)’를 들 수 있다.

(1) ㄱ. … 거의 할인 판매가 이뤄지지 않는 버버리 프라다 등 노세일 상품도 최고 90%까지 할인 판매한다.
ㄴ. … 이 날 속이 비치는 얇은 흰색 바지가 소품으로 등장하자 아예 노팬티로 촬영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

(1)의 예에 보이는 ‘노세일(←no sale)’과 ‘노팬티(←no panties)’는 신어(사전에 없는 말)로 이 말의 앞부분에 쓰인 ‘노(no)’는 영어에서 형용사로서 자립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no touch(노터치)’, ‘no comment(노코멘트)’, ‘no cut(노 컷)’처럼 다른 말과 결합하여 구를 형성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노타이(no tie)’, ‘노타임(no time)’, ‘노플레이(no play)’처럼 영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 우리말에서 자주 쓰여 최근에 만들어진 사전류에 표제어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이렇게 ‘노(no)’를 사용하여 신어를 만드는 방식이 일본어식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이 우리말에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우리들에게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유형의 것으로 ‘노메달’, ‘노브라’, ‘노비자’, ‘노챔프’ 등을 더 들 수 있다. 영어의 자립적인 단어였던 ‘노’가 우리말에서는 접두사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영어에서 자립적인 단어였던 ‘맨(man)’은 우리말에서 접미사처럼 쓰이고 있다. ‘당구맨, 광고맨, 세계맨, 증권맨, 헌혈맨, 홍보맨’의 ‘맨’이 그것이다.
   반면 영어에서 자립적인 단어가 아닌, 단어의 일부 또는 접사로 쓰이던 말이 우리말에 들어와 비교적 자립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2) ㄱ. ‘테크노 여전사’ 이정현이 제1회 전주 국제 영화제의 명예 홍보 대사로 위촉됐다.
ㄴ. 서울 숙명여대 중강당에서 열린 ‘청파 은혜제·성년제’ 행사 도중 빨간 가발을 쓴 이경숙 총장과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테크노 춤을 선보이고 있다.

(3) “사이버 시대에 단순히 인터넷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이를 전 산업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는 전문 양성하겠다.”라고 밝혔다.

(2), (3)의 ‘테크노(techno)’, ‘사이버(cyber)’는 영어에서 단어의 일부 또는 접사로 쓰이는 말인데 우리말에 들어와 비교적 자립적으로 쓰이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사이버 공간’의 ‘사이버’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영어 단어의 일부가 우리말에서 접사나 어근처럼 쓰이는 예이다.

(4) 컴: 컴닥터, 컴도사, 컴맨, 컴맹, 컴섹, 컴시인, 컴팅 (5) 팅: 삐삐팅, 소개팅, 컴팅, 폰팅

(4)∼(5)의 ‘컴’, ‘팅’은 모두 computer, meeting이라는 영어 단어의 일부이다. 이러한 영어 단어의 일부가 우리말에서 신어를 만드는 데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어 이 말들은 이제 접미사화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그러나 ‘컴맹’의 ‘-맹(盲)’이 접미사이므로 완전한 접사로 볼 수는 없고 대부분의 1음절 한자와 같은 어근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