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표기법의 이해

‘게놈’인가 ‘지놈’인가?


정희원(鄭稀元) / 국립국어연구원

미국에서 발간되는 세계적 과학 전문 주간지 “사이언스”는 최근, 게놈 지도의 초안을 완성한 일을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업적으로 꼽았다. 인간을 비롯한 생물체의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여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첫발을 내디딘 것을, 그들은 지난 100년간의 가장 뛰어난 과학적 업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생명 공학 회사인 셀레라 지노믹스는 휴먼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 이 소식을 전할 때 ‘게놈’이라는 용어와 ‘지놈’을 함께 사용하여 한동안 표기 혼란을 빚은 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게놈’과 ‘지놈’이 다른 개념인지, 같은 개념이라면 왜 신문에 따라 달리 표기하는지, 그리고 표준 표기는 무엇인지에 대해 문의를 해 왔다. 때마침 우리말 외래어의 표준 표기를 결정하는 ‘정부 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 위원회’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Genom(genome)의 우리말 표기는 ‘게놈’으로 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게놈’으로 표기할 것인가 ‘지놈’으로 표기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외래어의 원어를 독일어 Genom으로 볼 것인가 영어 genome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말 외래어 표기의 기본 원칙은 ‘원음에 가깝게 적는다’는 것인데, 이 말의 독일어 발음은 [genom]이고 영어 발음은 [dʒi:noum]이기 때문이다. 본디 이 말은 유전자를 뜻하는 gen(gene)과 염색체를 뜻하는 chromosom(chromosome)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독일의 식물학자인 빙클러(Winkler)가 1920년대에 처음 이 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말에는 이 말이 이미 1930년대에 일본어를 통해 들어와 지금까지 ‘게놈’으로 사용되어 왔다. 국내에서 간행된 여러 종류의 사전을 조사해 보면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백과 사전, 생물학 전문 사전, 그 밖의 교과서 등에서도 일제히 ‘게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낱말은 우리말에서 이미 오랫동안 ‘게놈’이라는 표기로 혼란 없이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게놈’과 ‘지놈’의 용어 문제가 갑자기 불거진 것은 지난 5월 한 언론사가 느닷없이 “‘게놈’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용어이니 ‘지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외국 학자들이 지놈으로 발음하고 있으며, 현재 이 연구가 미국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정부 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 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지놈’으로 독자적인 표기를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들의 언어생활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는 것으로 책임 있는 언론사의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외래어 표기법에는 ‘원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는 원칙 외에도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우리말에 들어와서 굳어진 외래어는 현지 발음과 다르더라도 표기형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디오, 바나나’로 굳어진 것을 굳이 현지 발음에 따라 ‘레이디오, 버내너’로 적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어식 발음에 따른 ‘지놈’보다는 몇 십 년 동안 써 오던 ‘게놈’을 표준으로 정한 것이다.
   사실 표기만을 놓고 보면 ‘게놈’과 ‘지놈’ 중에서 어느 한 어형이 반드시 그렇게 표기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 합의를 거쳐 어느 하나로 통일해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돌실낳이’를 알고 나면 ‘막낳이’, ‘봄낳이’, ‘명주낳이’, ‘무명낳이’, ‘여름낳이’ 또한 옷과 관련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맞춤법에 꼭 맞는 우리말을 쓰는 일은 몸에 꼭 맞는 한복만큼이나 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