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맞춤법

“모두 물렀거라”


정희창(鄭熙昌) / 국립국어연구원

예전에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는 맨 앞에서 길을 내는 길잡이가 있어서 벼슬아치의 행차를 알렸다고 한다. 그러한 역할을 맡은 하인을 ‘갈도(喝道)’라고 한다. 텔레비전 역사물을 보면 길잡이 하인이 “모두 물렀거라.” 하고 외치면 길 가던 백성들이 옆으로 비키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데 이때의 ‘물렀거라’를 ‘물럿거라’로 잘못 적는 일이 많다. ‘물렀거라’와 ‘물럿거라’는 소리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게 섰거라’도 이와 비슷하다. ‘게 섯거라’로 잘못 적는 일이 많은데 이 말 또한 소리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물렀거라’와 ‘게 섰거라’의 표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ㄱ. 물렀거라(←물러 있거라)
ㄴ. *물럿거라(물러 있거라)
(2) ㄱ. 게 섰거라(←게 서 있거라)
ㄴ. *게 섯거라(게 서 있거라)

(1)의 ‘물렀거라’는 ‘물러 있거라’에서 줄어든 말이다. 받침을 ‘ㅅ’으로 적지 않고 ‘ㅆ’으로 적는 것도 ‘물러 있거라’에서 준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본딧말의 ‘있’에 쓰인 받침 표기가 줄어든 말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셈이다.

‘한글 맞춤법’에는 이처럼 줄어든 말에서도 본딧말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원리가 있다.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면 본딧말과 준말의 관련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1)의 ‘물렀거라’를 ‘*물럿거라’처럼 적지 않는다. (2)의 ‘게 섰거라’도 마찬가지다. ‘게 서 있거라’에서 온 말이므로 역시 ‘있’의 받침을 드러낸 ‘게 섰거라’로 적는다.

이러한 원리가 적용된 말에는 ‘옜다’, ‘옜소’, ‘옜습니다’도 들 수 있다. ‘여기 있다’, ‘여기 있소’, ‘여기 있습니다’에서 줄어든 말이므로 ‘*옛다’, ‘*옛소’, ‘*옛습니다’로 적지 않고 ‘옜다’, ‘옜소’, ‘옜습니다’로 적는다.

(3) ㄱ. 밭벽(←바깥벽)
ㄴ. 엊저녁(←어제저녁)

(3)의 ‘밭벽’, ‘엊저녁’은 ‘바깥벽’, ‘어제저녁’에서 줄어든 말로 본딧말의 ‘ㅌ’과 ‘ㅈ’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