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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진술 방식(3) -묘사를 중심으로 2-

김희진(金希珍) / 국립국어연구원

'묘사'는 묘사할 대상을 어떤 위치나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관점을 고정하거나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의 어떤 면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나눌 수도 있다. 다음의 (1)은 사회적 배경에, (2)는 글 쓴 이의 심적 태도에, (3)은 묘사 대상에서 이끌어 낸 원리에 각각 초점을 둔 예다.

(1) 청계천 일대에는 복원의 청사진과 생존의 절박함이 뒤엉켜 있었다. (중략) 햇볕도 비켜 가는 5평 남짓한 주물 공장의 낡은 벽에는 수십 년 된 세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흑백 사진처럼 빛바랜 상가에서는 허탈감이 새어 나왔다. (중략) 청계천 일대 1000여 개의 노점상과 3만여 곳의 저소득 영세 사업장에도 불안감이 감돌기는 마찬가지다. (구혜영 박지연, 청계천의 추억, 대한매일 2003. 6. 19. 9.)

(2)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1936. 朝光)

(3) 찾아 오른 앞산에는 온갖 푸나무들이 잘도 어울려 자라고 있다. 푸나무의 종류와 크기와 잎새들의 생김새와 초록의 색도는 엄청 달라도, 산자락은 온통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풋풋하고 시원스런 녹음이라서, 다름 아닌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중략) 가지들은 서로 엉키면서도, 어긋나는 자리로 서로 비켜 주고 비켜 받으며 사이좋게 자라고 있어, 왠지 사람들보다 덜 싸우며, 제 몸과 가지들을 구부리고 휘어 가며 자라는 모습이, 서로가 조금씩 비켜 주고 비켜 받는 양보와 화해의 모습 같아 보인다. (중략)
    우리는 왜 이 푸나무의 가지와 잎새들처럼 서로에게 조금만 비켜 주고 비켜 받느라, 자기 생각을 조금씩 구부려 주고 휘어 주지 못할까? 자기 감정의 칼날만 예리하게 벼리어 서로를 겨누듯, 상대방에게만 비키라고 하는 건 아닐까?(유안진, 푸나무들도 和而不同하는데, 조선일보 2003. 6. 20. 26. 시론)

(1) 청계천 복구를 앞두고 명암이 엇갈린다. 청계천 복구로 역사와 환경을 되살리고 시민의 휴식처를 마련한다는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청계천 상가나 노점에서 생업을 꾸려 오던 상인들이 복원 공사로 생존권을 위협당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어두운 면도 있다. (1)의 묘사는 같은 사안이라도 공동체 간에 이해(利害)가 상반되고 양립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2) 보잘것없는 장돌뱅이 주인공이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걸을 적마다 떠올리는 추억이 있다. 젊었을 때 물레방앗간에서 어떤 처녀와 인연을 맺은 일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어 그 일을 생각하면 달빛, 산, 고개, 개울, 벌판, 산길, 농작물, 나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들을 정치(精緻)하게 묘사한 장면이 옛 일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과 기대 어린 설렘이 은연중 담겨 시적인 정취도 자아낸다.
    (3) 조화롭게 살아가는 초목을 묘사하면서 발견한 '화이부동'을 인간이 본받아야 할 원리로 이끌어 내었다.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여 끝없이 충돌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초목의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함에 주안을 둔 것이다.

<참고> 지난 6월호(통권 제59호)의 동일 제목의 부제 '-설명을 중심으로-'를 '-논증을 중심으로-'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