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 언제였습니까.
박토(薄土)를 갈아
메마른 흙에 씨를 뿌리던 그날이
─ 얽힌 가시덩굴을 베어내고
거친 돌멩이를 골라내고
무성한 잡초를 뽑아내고
황야를 밭으로 일군
아름다운 손이 있었습니다.
그의 손 끝에서
하나, 둘, 셋 뿌려진 씨앗들 ─ 사과, 배, 감,...
이제 과목의 탐스런 과실들로 열려
이렇게 온 하늘 가득하군요.
아아, 그 언제였습니까.
가난한 정신을 갈아
미욱한 마음에 한줄기 빛을 내린 그날이
─ 혼돈의 어둠을 몰아내고
무지의 감옥을 깨트리고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야만을 문명으로 일궈낸
아름다운 언어가 있었습니다.
그 음성에서
하나, 둘, 셋 뿌려진 씨앗들 ─ ㄱ, ㄴ, ㄷ, ㄹ,...
이제 모국어의 찬란한 의미들로
이렇게 온 나라가 풍요롭군요.
인간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이랍니다.
말씀을 먹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랍니다.
축시
말씀으로 사는 것이랍니다- 국립국어연구원 개원 10주년을 축하하며
오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