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연구소가 안국동에 있는 개인 건물(海影會館)의 한 층을 빌려 개소식(開所式)을 가진 것은 1984년 5월 10일이었다. 문교부 산하에, 학술원(學術院) 안의 한 기구로 출발하였다. 모든 것이 군색스럽기 짝이 없었다. 광복(光復) 이후에 국어·국문을 연구하는 국립 기관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광복 이전에는 우리의 어문 사업을 민간 단체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당당한 국가 기관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광복 전의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에 손을 대야 할 구석들이 있음을 지적하여 이런 기관의 설립을 촉구하는 일이 잦아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5월에는 국어학회, 국어국문학회, 진단학회 등 아홉 학회의 이름으로 문교부 직속 기구로 국어연구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고 1983년 5월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열한 학회의 이름으로 국무총리 직속 기관으로 국립국어연구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언론에서도 논설을 통하여 학계의 건의에 힘을 실어 주었다.
국어연구소의 설립은 이러한 학계와 언론계의 여론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정부가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그것은 국립 기관이 아니라 정부의 예산 보조를 받아 운영되는 학술원 안의 한 비공식 기구로서 첫해에 1억 4천여만 원의 보조금을 받아 11명의 인원 구성(소장, 연구원 4명, 조사원 6명)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 연구소에 관한 규정 및 사업 계획은 학술원 인문 사회 제2분과 위원회에서 마련한 것이었다. 학계의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으나, 이렇게라도 국어연구소가 문을 연 것은 다행이었다. 정부가 하는 일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생각이 몸에 밴 탓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로써 그동안 끌어온 맞춤법과 표준어의 개정 작업을 여기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교부가 1970년에 국어심의회를 구성하여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의 개정 시안을 마련한 것은 1979년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공포, 실시하기에는 미비점들이 있어 1981년에 학술원에 이 안들을 이관하여 체계적인 연구 검토를 하였었다. 이에 학술원에서는 1982년 초에 인문 사회 제2분과 위원회를 중심으로 어문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밑에 실무 추진을 위한 분야별 소위원회에 손을 대었고 정부의 어문 정책과 북한의 언어에 관한 연구, 국어 순화 사업에도 관여하였던 것이다. 소수의 인원으로 이런 일들을 했으니 연구원들의 노고가 참으로 컸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4년간 애쓰신 김형규(金亨奎) 선생의 뒷받침이 있었음을 잊을 수 없다. 국어연구소가 간행한 책들은 앞으로 내내 우리나라 어문 연구의 기초 자료로 남을 것이다. 여럿이 있지만 그중에서 1988년에 간행된 『한글 맞춤법 해설』과 『표준어 규정 해설』은 새로운 맞춤법과 표준어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고대하던 전국의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외래어 표기 용례집』(3권, 1986-88), 『표준어 모음』(1990)도 좋은 참고가 되었다. 그리고 1984년 10월에 창간호를 낸 뒤 23호(1990년 겨울)까지 꾸준히 간행된 『국어생활』의 존재가 돋보인다. 여기서 공간(公刊)되지 않은 자료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둔다. 특히 국어연구소가 1987년 9월에 마련한 「한글맞춤법안」, 「표준어 규정안」은, 그 이전의 문교부 시안들(1979), 학술원 개정안들(1983)과 함께, 현행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의 형성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자료를 소중히 간직하는 전통이 수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90년 초에 국어연구소가 그 소속을 문교부에서 문화부로 옮기게 되었다. 어문 정책이 문화부로 이관됨에 따른 것이다. 이때에 이미 문화부는 국립 기관으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 왔고 제3대 소장(李基文)의 임기 만료로 4월에 새 소장으로 취임한 안병희(安秉禧) 선생은 이 일을 위한 준비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듬해 1월에 국립국어연구원은 그 순조로운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국어연구소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그 시종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길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뒤끝을 마무르는 일이 소홀했음을 뉘우치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국어연구소에 몸 담았던 연구원들이 힘을 합하여 이 일을 완성해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