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뜰을 걸어 나가며 미국에서 잠시 들르러 오셨던 이종숙 교수가 말했다. "몇 대를 적선(積善)하셨기에 이런 데서 근무하세요?" 임금이 머물던 고궁을 드나들던 2년은 이래저래 내게는 특별한 2년이 아닐 수 없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원장 자리가 제의 왔을 때 선뜻 마음이 결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디 얽매인다는 것이 체질적으로 잘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광현 형에게 우선 상의하였다. 무슨 소리냐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기문 선생께도 의논을 드렸다. 같은 반응이셨다. 차관한테서 다시 전화가 오고, 응낙하고, 그렇게 일은 시작되었다.
역시 모든 것이 어설펐다. 취임식이라는 절차며 장관실에서의 발령 행사며 간부 회의며 2주일에 한 번씩 있는 본부 회의며 기자 간담회며, 좀 나중 일이지만 국회에 들락거리는 일이며 새 청사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일이며, 또 나중에는 구조 조정 때문에 국어연구원의 운명을 걸고 뭇사람을 만나는 일들이 도무지 내 몸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2년을 후회 없이 보냈다. 열정의 2년이었다고나 할까. 나로서는 정열을 쏟을 만큼 쏟으며 나날을 활기차게 보냈다. 퇴임식 때 말했지만 마치 마라톤 선수가 42.195km에 맞추고 온 힘을 다 쏟듯이 나는 2년에 맞추고 더 이상 여력이 없을 정도로 내 힘을 다 쏟아부었다. 떠나는 걸음이 가벼웠던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자족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국어연구원을 맡으며 나는 스스로 차범근을 자처하거나 정명훈을 자처하였다. 아니면 담임 선생이라는 생각도 자주 하였다. 좋은 감독이 되고, 좋은 담임 선생이 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감독이 어떻게 하기 전에, 담임 선생이 어떻게 하기 전에 그들은 이미 성실한 선수, 유능한 연주자였고, 훌륭한 생도들이었다. 감독의 뜻을 그렇게 잘 따라 줄 수가 없었고 그렇게 늘 웃음 가득한 얼굴로 담임 선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가 없었다. 학교에 돌아와 어느 사은회 자리에서도 국어연구원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국문과 사람들이 모인 곳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약삭빠르지 않고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푸근하고 정감이 있는 분위기를 국어연구원에서도 느꼈노라고. 내가 2년 동안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 국문과적인 심성 덕택이었을지 모른다. 어떻든 연구원이고 사무원이고 고용원이고 할 것 없이 한결같이 내 마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었던 것을 나는 지금껏 고맙게 여기고 있다.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떨어진 과제가 로마자 표기법이었다. 벌써 오래전부터 독촉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늦출 이유도 없었다. 바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회의는 내가 주재하였다. 마치 회의하러 연구원에 온 듯 회의는 이것 말고도 끝없이 이어졌는데 이 회의는 워낙 난제였던 관계로 더욱 힘이 들었다.
관심 분야가 비교적 넓은 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동안 로마자 표기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던 것을 알았다. 새삼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문제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모르면 손 빼라'는 바둑의 교훈까지 동원해 가며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루면서 하나씩 의견을 모으다 보면 나머지 문제도 자동적으로 풀리곤 하였다. 어렵게 어렵게 어떻든 새 안이 마련되었다. 나로서도 최선의 안이라는 생각이었고 본부에서도 여간 흡족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큰 난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새 안(案)을 본부에서 어느 한 신문에 특종으로 준 것부터 잘못이었다. 경쟁 신문사에서 발 벗고 반대의 깃발을 드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들의 반발은 더욱 거셌다. 결국 본부에서 주춤거리기 시작하였고, 선거가 시작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고 하면서 이 새 안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일은 악몽 같기도 하다. 누구는 원장이 사안(私案)을 만들어 놓고 고집을 피운다고 비난하였다. 원장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표기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는 새 로마자 표기법이, 로마자 표기법의 기본 정신에 충실함은 물론 어떤 일관된 원리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토론 과정에서 이런 것이 설득이 되면서 결국은 새 안이 만들어진 것이지 원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사안을 만들겠는가. 사안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던 작품인데 물거품이 된 것을 생각하면 허탈한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자부심은 있다. 그때의 것이 지금의 로마자 표기법보다 우수한 것이었다는. 솔직히 지금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주제 불명(不明)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것을 만들려면 확고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럴 바엔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1984년의 것(매큔-라이샤워 案)을 그대로 쓰는 것이 한결 낫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성공 여부는 이제 두고 보아야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공평치 못한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회의는 실상 국어사전 때문에 더 많이 열렸다. 사전 일은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진척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니 정작 기초적인 작업이 제대로 안 된 것이 너무 많았다. 『편찬 지침』을 보았을 때의 내 낭패감이란! 부랴부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접두사와 접미사의 기준을 정하는 일만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회의는 으레 예정 시간을 넘기고 직원들이 퇴근한 후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회의에 제발 그만 불러 달라고 푸념들 하면서도 여러 분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일해 주었다.
이 회의에서는 맞춤법도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하였다. 막상 국어사전을 만들다 보니 현행 규정만으로는 전후 모순되는 것도 발견되고 어느 한쪽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도 발견되어 이들을 손질하지 않고서는 규범을 보여 주어야 할 사전이 난관에 봉착하겠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장 부호는 현행의 것이 너무 부실하여 전면적으로 새 안(案)을 만들었다.
결국 맞춤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어심의회에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도 곧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더 큰 악몽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면 한 권의 소설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국어정책은 학문이 아니다. 순수성과 진실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도의 계략과 작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천진하였다. 누군가 지금도 우리의 순진성을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우매한 일군(一群)의 완력에 분노와 함께 동정의 심정을 누를 길이 없다.
모처럼 국가가 만드는 국어사전은 다른 한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맞춤법에서부터 좌절을 겪었다. 완력들은 말했다. 국어사전은 새 안대로 하라고. 그래서 아쉬운 대로 그렇게나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 사전을 펴 보면 그것은 역시 한계가 있는 조처였다. 연구원들은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말썽 많던 '고등학교'나 '임진왜란'은 제대로 붙여 썼다. 그런데 '고유-명사', '두음-법칙' 등은 여전히 띄어 놓았다. 이들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복합어(합성어)이므로 붙여 써야 함에도 전문 용어라는 이유로 띄어 쓰고 있는 것이다. 미처 한 단어(복합어)가 안 된 고유명사들을 편의상 붙여 쓸 수 있다고 한 규정을 거꾸로 잘못 적용한 악습이 『표준국어대사전』에서조차 바로잡히지 않은 것이다. '어느-것'도 흔히 대명사로 거론되는 것이니 붙여 한 단어로 올렸어야 좋았을 것이다.
국어사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전은 마감 시간에 맞추어 돌진하는 상태여서 많은 부분이 이미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운 지경에 있었다. 원로들로 구성된 추진 위원회를 열면 당연히 제기될 주문이 쏟아졌다. 특히 예문들이 문제였다. 너무 젊은 작가의 글이 많았고 그나마 일부 소설가에 편향되어 있었다. 예문을 바꾸는 일이 그 후 상당히 이루어졌지만 어느 정도나 만족할 수준까지 되었는지는 미지일 수밖에 없다.
방언, 고어, 고유명사의 수록 범위도 미리 좀 더 철저하게 정하고 일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잡다하게 다 들어가 있는 상태여서 이것도 몇 번에 걸쳐 조정을 해야 했다. 순수히 국어사전을 만들라는 주문이 많았지만 애써 만들어 놓은 원고를 버린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버리는 데 용감하라" 이것은 어디에서도 유용한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국어사전을 좀 더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지금껏 한 가닥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있었다고 하여도 거기에서도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원장이기보다 교정원이라 자처하며 실제로 교정을 보며 많은 것을 바로잡아 나갔다. '색사발' 때문에 몇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돌감' 때문에도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복식가에게고 미당 서정주 시인에게고 염치 불고하고 전화를 걸어 의문들을 풀어 나갔다. 그리고 『역사 앞에서』며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등에서 용례를 뽑아 사전실에 넘기기도 하였다.
'혼불'을 비록 방언으로서이지만 사전에 올리게 된 것은 한 보람으로 떠오른다. 최명희 여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던 것은 내가 원장으로서 한 가장 잘한 일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연설문은 『새국어생활』에 채록되어 실렸지만 국어연구원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살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몇 번이고 읽어야 할 감동의 글이다. 그 글을 얻을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더없이 큰 보람으로 생각하거니와 그때 최 여사가 국어사전에 '혼불'이 안 올라 있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것이 또한 계기가 되어 '혼불'을 우리 사전에 올리게 된 것이다. 방언을 어느 만큼 사전에 실을까가 고민이 될 때 이기문 교수는 문학작품에 쓰인 방언을 위주로 싣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매우 합리적인 방안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미처 자료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그 방안을 실천할 수 없었지만 '혼불'은 바로 그러한 방안의 한 실천이기도 하였고 내가 고인(故人)에게 드린 조그만 선물이라고도 생각된다.
내가 지휘자였다면 2년 후 국어연구원이 내는 음색이 나로 하여 어떻게든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달라진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나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국어연구원은 격이 좀 더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 내 일관된 생각이었다. 『새국어생활』의 표지부터 촌스러움을 벗고 격조 있게 만들려 한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고, 연구원들에게 공부하는 자세를 끊임없이 강조하였던 것도 같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원장실도 행정실의 분위기보다는 연구실의 분위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물론 외부에서 국어연구원의 위상을 높여 주려는 자세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내부적으로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탄탄한 실력을 쌓으며 연구원 업무의 고유성을 확고히 해 갈 때 비로소 국어연구원이 굳건한 기반 위에 서게 될 것이다. 국어연구원이 결코 잔심부름이나 하는 곳일 수는 없다. 잡다한 행정에 휘말려 본연의 임무가 뒷전으로 밀리는 그런 곳일 수도 없다. 국어의 먼 장래가 이 연구원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사명감이 충만한, 그러한 자부심으로 연구의 열정이 불꽃 튀는 그런 곳이어야 할 것이다.
국어연구원이 사는 길은 모국어가 사는 길일 것이다. 국어연구원의 발족은 그것을 위한 커다란 발판을 마련해 주었음에 틀림없지만 사실 현재로서는 너무나 힘이 없다. 내 환갑 논설집인 『국어 사랑 나라 사랑』에 대한 취재차 들른 이선민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글에 전권(全權)을 잡으면 '리퀘스트 아워' 같은 외래어 남용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전권은 몰라도 반권(半權)은 잡으셨는데 어떠셨나요? 반권이라? 글쎄, 갑자기 온 몸을 감싸는 회오리. "방해꾼투성이었지" 국어연구원이 권위를 얻고 제 기능을 기분 좋게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빌고 빈다. 그리고 옛 동지들과 다시 한번 외쳐 보고 싶다. 국어 사랑 나라 사랑!
회고와 바람
국어연구원 시절
이익섭 / 제4대 원장 역임·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