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어연구원에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91년 '공공 기관의 안내 방송 문안 조사 연구'에 참여하면서였다. 네댓 번의 운니동 회의에 참석하여 버스, 지하철, 공항 등의 안내 방송 문안을 다듬었다. 개원하고 불과 몇 달 뒤였는데, 그때 연구원은 이 일 말고도 국어 사용 실태 조사와 오용 사례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어느 신문사와 함께 '우리말의 예절'을 정리하는 일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에 미처 깨닫지 못한 여러 국면의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을 엿보게 된 터라, '세상이 넓다더니 할 일은 더 많구나' 싶었다.
그 연구원이 어느새 열 돌을 맞는다 한다. 대견한 일이다. 국가 기관인 연구원을 두고 일개 서생이 '대견'을 말하는 게 당찮을 줄은 알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흐뭇하고 자랑스럽다'의 뜻으로 풀이된 말을 찾으니 이 '대견하다'와 '장하다'만 눈에 띄었다.
35명 직제의 영세 규모로 출범한 신생 기관의 '10년사'는 그 자체로 이미 대견스러운 일이겠거니와, 연구원은 이 10년 동안에 우리나라 어문 정책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국내외에 널리 확인시켜 놓았다. '새국어생활'은 특집 주제들의 전문성과 수록 논문의 높은 수준에 힘입어 여러 대학에서 저명 학술지의 반열에 올라 있고, '가나다 전화'를 찾는 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음은 국민의 신뢰를 반영하는 것이다. '국어문화학교'와 '한국어 전문가 파견 및 해외 동포 초청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으로 양성된 규범 전문가도 수천에 이른다. 어디 그뿐인가? 작년과 금년에 연구원은 더없이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두 가지 큰 결실을 얻었다.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을 완결하여 발간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개원 이래의 숙원이었던 독립 청사를 방화동에 신축하여 입주한 것이다. 셋방 청사와 곁방살이를 전전하며 두 번씩이나 정부 기구 축소의 어려운 여건을 헤쳐 온 연구원이 이제는 더 이상 '신생'의 불안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탄탄한 기반을 확보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다 아니할 수 없다.
1993년 3월 하순부터 2년간 나는 어문규범연구부장을 겸직하였다.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는 본직의 강의 시간을 핑계로 주 이틀 반 근무의 조건을 내세웠고, '겸직'을 위안 삼아 약간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장충동 청사를 향했다. 그러나 막상 업무에 부닥치고 보니 당시 젊은이들이 쓰기 시작한 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발령장을 받고 나니 원장은 "그런 약속을 했을 리가 없다" 하며, "강의 시간을 조정해서라도 우선 사흘은 나와야 하고, 다음 학기부터는 나흘 근무"라 못 박으셨다. 이듬해 여름 덕수궁 청사로 이사한 뒤에는 일이 더 많아지고, 학교 가는 날에도 먼저 연구원으로 출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강의를 마친 뒤 다시 연구원에 들러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기록해 두지 않아서 분명히 말할 수는 없으나, '주 8회 출근'만 해도 열 번을 넘었으면 넘었지 그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많았다 했으나 부장은 중간 결재자일 뿐 조사나 연구를 분담한 것은 아니고,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여기저기 회의에 참석하고 이런저런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서 결재에 애를 좀 먹었다. 대개의 공문서는 이른바 개조식이 기본 틀인데, 나는 이 문체에 낯이 설었다. 원내 연구직들도 서투르기는 비슷하였다. 젊은 학자들이 가져온 심오하고 장황한 기안문을 그대로 통과시켜서는 원장 결재를 받아낼 수 없으니, 한 줄 한 줄 끊어 읽으며 의미를 찾고 교열하고 퇴짜 놓는 데에 시간을 많이 썼다. 총리실에서 내려온 열댓 장 분량의 행정 백서를 복사해 놓고 개조식 문장의 특징을 살폈다.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원장 결재가 조금 수월해졌다. 느낌이 그랬다.
부임과 함께 내게 맡겨진 가장 큰 임무는 2년째 접어든 '종합국어대사전(가칭)의 편찬 발간' 사업을 본격화하는 일이었다. 어문 규정들을 사전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었는데,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모자라다 보니, 작업은 시작 단계에서 맴돌고 있었다. 10년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나, 발간 시기를 점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천성이 게을러 책임질 일 맡기를 꺼리는 나로서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발간은 먼 후일로 미루고, 주어진 예산의 범위 안에서 편찬실이나 운영하며 작은 성과들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 편하고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원장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 오히려 사업 기간을 줄여서라도 적극적 예산 지원을 유도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계셨다. 어떻게든 임기 안에 이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 놓을 작정이셨다. 그래서 나도 편찬실 사람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때 사전편찬실에는 다섯 명의 편수원이 있었다. 내가 가기 두 달쯤 전부터 사전 원고를 시험 집필하면서 매주 한 번씩 '사전 편찬 회의'를 열어 집필 지침을 다듬고 있었다. 매우 유능한 소장 학자들이었다. 곧 연구 각부의 정규직 학예연구사가 되었으나, 자리는 여전히 편찬실에 배치되어 이후로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다들 개성이 강한 데다가 의뭉에도 일가견들이 있어서 일을 재촉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가듯 "지금까지 집필한 항목이 모두 몇 개냐" 하고 물으면 "아직 덜 된 것까지 80개 정도"라 하고, "몇 개만 보자" 하면 "좀 더 다듬어서 보여 주겠다" 했다. '그냥 현재 상태로 보자' 하고 싶은데 틈을 주지 않는다. 집필 지침에 관련된다며 까다로운 질문을 한두 개 던져 주고는 깜빡한 일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아차" 소리만 남긴 채 얼른 자리를 떠 버린다. 그렇게 들은 항목 수들을 합해 보니 350을 조금 넘는데, 미덥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집필 중인 것까지만으로 '300단어집'이란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 지침도 붙이자. 그걸로 다른 분들 의견을 들어 보는 것도 좋겠고" 이렇게 해서 '종합국어대사전(가칭) 시험 집필 300단어집'(1993. 7. 1.)이 만들어졌다. 이 작은 책자가 50만 단어를 담은 '표준국어대사전'의 모태였다. 20면 남짓의 '집필 지침(시안)'을 부록으로 넣었는데, 이것이 700여 면의 '표준국어대사전 편찬 지침'(2000. 8. 31.)으로 발전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업 기간 단축과 함께 예산이 확보되면서 편찬실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덕수궁 청사로 와서는 편찬실 식구가 편수원과 조사원을 합해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석조전 서관 1층은 공기가 음습하고, 작업 공간이 너무 좁았다. 업무 분담에 따라 자리를 배치하고 보니, 마치 방직 공장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에서는 자판 두들기는 소리, 저쪽에서는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또 저쪽에서는 카드 상자 여닫는 소리.... 어려운 환경에서 모두들 참 열심히 일해 주었는데,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보답할 방도가 없었다. 실장의 유세에 넘어가 '오후 세 시 반'을 눈감아 준 것과 어쩌다 한 번씩 부장 수당을 쪼개 빵이나 과자를 부조한 게 고작이었다. 나중에 어림해 보니, 그렇게 나간 돈이 쏠쏠(?)했다. 다음 해 초 원장이 갈리면서 내 겸직도 거의 끝나 왔다. 이번에는 후임 추천에 애를 먹었다.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 임기를 연장받아 버릴까도 싶었다. 그러나 결론이 너무 자명했다. '아무도 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자리가 아님을 뜻한다. 자리가 좋지 않은데 계속 머무르는 것은 어딘가 비범한 사람의 일이다. 내가 비범한 사람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가야 한다.' 어쩌다 틈새를 보이고 만 후보 한 분을 붙들고 늘어져 얼른 그 좋지 않은 자리를 덮어씌우고, 나는 네 단계의 논리적 귀결에 떠밀려 본직으로 돌아왔다. 3년 전인가, 어문 규정 관련 회의로 석조선 서관까지는 여러 번 갔으나, 연구원은 거의 들르지 못했다. 회의는 주로 문화재관리국 회의실에서 열렸고, 마치고 나면 그만둔 직장 근처를 어른거리는 게 아니라던 어느 친구의 충고가 떠올라 아래층 편찬실로 향하려는 발길을 쑥스럽게 했다. 지금은 다 옛날 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철마다 보내 주는 『새국어생활』이 고마운 위안이 되고 있다. 그래도 새 청사에는 꼭 한번 가 보고 싶다.
회고와 바람
국어연구원 시절을 돌아보며
박양규 / 제2대 어문규범연구부장 역임·성균관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