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8·15 광복절이다. 맛과 향기가 산뜻한 리슬링 한 잔을 마시고, 언덕배기 집 3층에서 라인 강을 바라본다. 라인 강에는 배들이 자주 지나간다. 기다란 배에는 독일 국기를 비롯한 이태리, 프랑스, 스위스, 영국 국기들이 나부낀다. 일본 국기가 펄럭이며 지나간다. 두 눈을 뜨고 아무리 보아도 대한민국 국기는 보이지 않는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부강하여 독일 라인 강에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날에는 조국의 긍지와 자부심이 솟구치리라. 나는 지금 언어와 생활 습관이 전혀 다른 독일에서 적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신비의 수상(水上)도시 '베니스'도 본고장인 이태리에서는 Venezia(베네치아)요, 영어식은 Venice(베니스)요, 독일식은 Venedig(베네디히)이다. 각기 나라마다 이름이 다르다. 이태리 현지에서 길을 물을 때 '베네치아'로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어식으로 배워왔기에 '베니스'로 부른다. 이 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차라리 외국의 고유 지명과 인명은 현지 발음으로 부르거나 적는 것이 좋겠다.
프라하(Praha)에서는 유명한 맥주 필스(Pilsner)를 맥주 캔에 PIVO, BEER, BIERE, BIER, BIRRA, CERVEZA, CERVEJA의 7개국 발음으로 적어 외국 관광객에게 선전하고 있다.
우리의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이 어느 나라 외국인을 위한 표기이냐가 종종 문제시된다. 로마자 표기는 학술적으로는 국제 음성 기호(IPA)에 따라 적되, 특히 미국식 영어 (매큔-라이샤워) 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식 표기로 우리나라를 세계 각국에 알리는 데는 그 한계가 있고 문제가 많다.
나는 로마자 표기법 개정도 필요하지만, 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과제는 우리 고유 글자 한글을 전 세계에 정확히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한글을 대하기는 흔치 않다. 글자 면에서 유럽은 알파벳(Alphabet) 문자권이다. 중국을 위시한 동양은 한자(漢字) 문화권이다.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에 들지만, 여기서 일보 전진한 '한글 문자권'임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 '한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글자이다. 외국에다 한글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인식시켜야 한다.
이제 한국어는 국내에서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한인 동포가 거주하는 곳이면 세계 어디서든 통용되는 언어이다. 지금 외국에는 약 750만 명에 달하는 국외 한인 동포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가 과거 한때는 ① 중국 한자 종주국 시대는 변방의 언어로, ② 일정 시대는 일본 식민지 언어로, ③ 광복 후는 열강 속에 맹종만 했던 열등주의 언어가 될 뻔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분히 세계 패권주의로 가려는 미국의 언어 식민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은 미국식 영어권에 흡수되는 영어 식민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의 자유 개방주의 체제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제3 세계의 나라와도 원조하여 손을 잡아야 한다. 떠오르는 신생 국가 언어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 어느 한 국가를 따르는 것보다는 범세계적 지구촌의 언어 정책과 교육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각국의 흐름과 세계의 언어 정책을 파악하고 세계 각국의 문자 변천 과정을 이해하며, 세계 문자와 우리 글자를 비교 검토, 연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세계 문자 전시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자.
둘째, 미래 세계는 '한글 문화권'이 되도록 하자.
셋째, '좋은 언어 정책은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모토로 우리의 새로운 언어 정책을 세우자.
새로운 언어 정책을 세울 때는 다음 7대 지표를 바탕으로 하자.
1. 보편성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
2. 특수성 (한국어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서)
3. 규범성 (통일과 일치를 위해서)
4. 다양성 (개성과 변화를 중시해서)
5. 일관성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서)
6. 주체성 (고유성과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7. 창조성 (새로운 개발과 창조를 위해서)
이를 바탕으로 언어 정책을 펼칠 때 주의할 것은 언어 정책의 방향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언어 정책이 신뢰를 얻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 언어 현안의 완급과 우선 과제의 순위를 가려서 확고한 의지와 납득할 수 있는 처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나) 일단 결정한 정책은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면서, 그 정책이 우리 언어 현안의 장기 목표에 합치하며 상호 유기적인 조화가 있어야 한다.
다) 언어 정책은 주체적으로, 장기적이고, 거시적 안목으로 대처해야 한다.
라) 언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있다. 어느 한 집단(계층)에게만 언어 사용이 편중되면 언어 불균형의 결과를 낳는다.
마) 정책을 세울 때는 용어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 실례 하나를 든다. 서독이 통일 독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동독과 무역을 하면서도 '수출'이나 '수입'이란 용어 대신에 수출을 '공급(Lieferungen)'으로, 수입을 '구입(Bezüge)'이란 말로 바꾸었다. 이는 동독이 외국이 아니고,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닌 독일 내부 간의 거래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역에서 외국끼리는 '수출-수입'이란 용어를 쓰지만, 자국끼리는 '공급-구입'이란 말이 더 적절하다. 우리의 남북한 통일을 위해서도 명심해야 할 점이다.
미래에는 세계가 '언어 전쟁'이 생길지 모른다.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세계 변화의 조짐을 알고, 세계사의 흐름에 우리가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세계화의 잣대를 다시 바로잡아 지구촌 시대에 새롭게 대비하자. 미래를 창조하는 언어관을 정립하자.
역사 없는 민족은 없다. 그리고 언어 없는 민족도 없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국가들(로마, 스페인, 몽골 따위)의 멸망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새긴다. 자기 역사에 반성이 깊을 때 비로소 강한 신념이 생기고 발전을 이룩할 수가 있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발걸음은 느려진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할 때 발걸음은 빨라진다. 느림이란 기억이고, 빠름이란 망각이다."
- 밀란 쿤데라의 '느림(la leuteur)'-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새 역사를 열어야겠다.
우리나라가 세계 역사에서 주류 국가가 되느냐? 아세아의 주변 국가로 머무느냐? 이는 오로지 한국인의 주체적 인식과 끊임없는 노력에 달려 있다.
"신성한 이 원전을
내 사랑하는 독일어로 번역하고 싶다."
"(Mich drängt's,...)
Das heilige Original
In mein geliebtes Deutsch zu übertragen." - FAUST, 1221-1222 -
여기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을 나는
"신성한 이 원전을
내 사랑하는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다."
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훌륭한 우리 글자 한글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
언어는 문화를 가늠하는 척도(尺度)요, 나라를 대신하는 상징물(상징 기호)이다. '좋은 언어 정책은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미래를 창조하는 정책을 세우자. 세계 문자 전시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자. 미래 세계는 '한글 문화권'이 되도록 하자. 그런 뜻에서 국립국어연구원의 십년사(十年史) 발간을 기리며, 국립국어연구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축배를 든다. 건배!
2000. 8. 15. 광복절
독일 본(Bonn) 대학에서
회고와 바람
좋은 언어 정책은 좋은 나라를 만든다
최규일 / 제2대 어문실태연구부장 역임·제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