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늘은 유난히 '미아삼거리'란 전철역 간판이 눈에 띈다. 뭔가 달라졌다. 자세히 보니 아크릴 바탕 위의 로마자 역명 표기가 Miasamgeori와 같이 바뀌었다. '어' 모음 표기가에서 eo와 같이 바뀐 것이다. 그 옆에는 '彌阿삼거리'와 같은 한자 한글 표기가 더 있다.
일반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한글로 쓴 큰 글자가 중요하다. 그러나 저 작은 변화를 위하여 국립국어연구원은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을 것인가? 저렇게 바꾸기까지 겪었을 우여곡절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88 올림픽을 앞두고 로마자 표기법을 매큔-라이샤워식으로 바꿀 때에는 geobukseon과 같은 표기를 제시하고 외국인에게 발음하라고 하면 그것이 도저히 우리말 발음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순탄하게 예전 문교부식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로마자 표기 문제에 대하여 이만한 정도의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연구 1부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이 1991년 1월 23일이니, 내가 초대 연구 1부장인 셈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은 국어 관계의 일이나 국어학을 하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그 설립을 염원하고 있던 바로 그 기관이었다. 우리에게도 프랑스의 한림원과 같이 나라의 언어 문제를 연구하고 관장할 국가 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일이 모두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전에도 문교부 산하 학술원 부설의 '국어연구소'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어연구소도 착실히 국어 정책적인 사업을 진행하여, 1986년 1월 7일에는 '외래어 표기법'을, 1988년 1월 19일에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고시하였다. 그러고는 '한글 맞춤법 해설'을 내놓은 것이 1988년 6월 30일이고, '표준어 규정 해설'을 내놓은 것이 1988년 9월 30일이다.
어문 규범의 대강은 국어연구소에 의하여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문 규범 담당 부서인 연구 1부가 해야 할 일은 당시 문교부와 국어연구소에 의해서 마련된 규범을 시행하고 보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어문 규범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지금도 '있음'을 잘못 쓰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규범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측도 있었고, 규범 조항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나다 전화'나 '새국어생활'의 맞춤법 관련 질의 응답은 새로운 맞춤법이나 어문 관련 문제에 대한 일반인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문 규정이 어느 경우에나 명확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맞춤법 규정이 가능한 모든 사례를 검토한 뒤에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모호한 문제가 생겨나기도 하고, 미흡한 규정의 문제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 '표준어 규정 해설'은 표준어 사정이 국어의 전 어휘에 대해서 행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규범은 이미 정해진 것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실행되어야 한다. 이때에도 연구원은 규범이 세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사소한 문제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규범상으로는 작은 문제일지라도 때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전에는 '-읍니다'로 쓰던 것을 새로운 표준어 규정은 이것을 반드시 '-습니다'로 쓰게 하였다. 이 한 가지 변화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는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아동을 상대로 하는 모든 책을 다시 제작해야 했다고 한다. 학부모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규정상 '-읍니다'를 '-습니다'로 바꾼 사람들은 이러한 결과까지를 예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맞춤법 문제와 표준어 문제는 국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필요로 하였고, 표준어 사정 작업은 국어의 전 어휘에 대해서 확대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국어 대사전'을 편찬함으로써 충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꿈과 같은 일이 예산에 반영되고 기획되어 실제로 사전 편찬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한 20년 계획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20년 계획과 같은 것은 없고, 모든 사업은 10년 안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종합국어대사전'의 편찬 사업이었고, 2년이 좀 못 되는 동안 준비 작업을 한 뒤, 나는 연구원을 떠났다. 나머지 작업은 온전히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그동안의 과정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미숙한 점도 있었을 것이고, 시행상의 잘못으로 보이는 일도 있었을 것이나, 전체적으로 그 출발은 크게 빗나감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런 것은 달리 했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특히 사전 편찬 초기에 카드 작업을 한 것에 대하여 드물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다소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직도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에 대하여 나는 당시의 컴퓨터 성능이 전혀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사전 편찬 초기의 컴퓨터는 용량이나 자료 처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고어 처리도 엉성한 것이었고, 한자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의 내 생각은 카드 작업을 단순히 카드 작업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전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드 작업을 하는 동안 사전학적인 배경이나 사전 편찬 경험이 없는 사람도 사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것이 사전에 포함된 엄청난 문제들을 찾아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그러는 동안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사전의 모습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전 편찬의 일이 내 생각대로만 움직여 나간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전 3권으로 되어 있고 그 분량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분명 사전 편찬은 한 번에 그치고 말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수십 권에 달하는 이름 그대로의 대사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작업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20년 계획이 안 되면, 7년 계획을 3번 정도 연이어 하여 전체가 하나의 체계적인 사전이 될 수 있도록 기획을 해 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러한 사업과 더불어 국어연구원은 국어의 영역을 자꾸만 넓혀 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제안해 보았던 것의 하나는 국립국어연구원은 음성 실험실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언어를 조사할 수 있고, 우리말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 간혹 우리는 500년 전 세종 시대의 사람들이 국어를 어떻게 발음하였을까를 궁금해 하는 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500년 뒤에 오는 사람이 20세기나 21세기의 한국어의 실제 발음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지 말란 법이 없다. 혹시 방화동 청사에는 이러한 시설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업의 하나는 우리말 교육 비디오 테이프의 제작이다. 이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들의 우리말 교육이나 한국을 알려고 하는 외국인을 위한 국어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시청각 교재이다. 국제교육진흥원과 힘을 합하여 정말로 재미있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당시 이 일은 너무 예산이 많이 드는 것이었고,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진행되지 못하였다. 초창기에는 국제회의도 여러 번 개최하였고, 중국 동포들과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사할린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문가 파견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일들이 결국은 국어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는 사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은 국어 규범을 다루고 그것을 펴는 곳이다. 규범은 강제성을 띤다. 잘못된 것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하면 잘못된 규범을 강요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과학적인 근거와 철저한 조사에 의하여 타당성을 갖춘 규범이 국민을 설득하게 되기를 바란다. 지나치게 규범을 강제하는 것은 결국은 국어의 영역을 좁히는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 개원 10주년을 맞이하여 그 무궁한 발전을 기대해 본다.
회고와 바람
회고와 반성과 바람
임홍빈 / 초대 연구 1부장 역임·서울대학교 교수